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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밀레의 만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

김여사2 2016. 10. 7. 09:28


▲ "붉은 노을이 내려앉은 넓은 들판과 그곳에 울려퍼지는
교회종소리는 마치 인간의 노동을 찬미하는 음악처럼 느껴진다."

      '밀레의 만종’에 얽힌 슬픈 이야기

1857년 저녁 노을이 지는 들녘에서 한 가난한 농부 부부가 고개를 숙인 채 기도를 하고 있다. 캐다가 만 감자가 바닥에 흩어져 있고 멀리 보이는 교회당이 정지된 아름다움의 극치를 보여준다. '만종(晩鍾)'은 프랑스의 자랑이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백화점 소유주였던 알프레드 쇼사르가 80만 프랑에 이 작품을 구입 해 루브르 박물관에 기증한 후 한 번도 거래된 적이 없었던 '만종'은 값을 매긴다는 게 불가능한 보물이다. 그러나 작품이 처음 만들어진 1860년 당시 밀레는 물감을 살 돈조차 없는 가난 한 화가에 불과했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화상 아르투르 스테반스가 그림을 인수하는 조건으로 1000프랑을 지원한다. 이 1000프랑으로 탄생한 그림이 바로 '만종'이다. 이렇게 탄생한 만종은 100년 만에 80만 프랑 값어치를 얻었고 그로부터 또 100년이 지난 지금 프랑스의 자존심이자 전 세계 관광객을 끌어들이는 보물이 됐다. 1000프랑을 지원한 것이 국부(國富)를 일구어낸 것이다!! 루브르에 돌아오기 전 '만종'은 미국 아메리카 미술협회에 팔렸다. 프랑스 측은 국회와 행정부는 물론 모금활동까지 벌여 가며 '만종'이 미국에 팔리는 것을 막으려 했다. 그러나 부자나라 미국을 당할 수는 없었다. 프랑스가 자존심이 상한 채 주저앉아 있을 무렵 백화점 재벌 알프레드 쇼사르가 미국에 엄청난 대가를 지불하고 '만종' 을 다시 사들인 것이다. 쇼사르는 이 그림을 개인 자격으로 소유하지 않고 루브르에 기증했다. 예술의 가치를 알아본 쇼사르가 없었다면 '만종'은 지금쯤 미국 어느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을 것이다.


▲ 멀리 보이는 숲 뒤로 교회가 있는데
그 교회에서 울리는 종소리가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

'만종'은 '이삭줍기'와 더불어 많이 알려진 그림 중 하나다. 그림을 보면 하루 일을 마치고 농부 부부가 교회종소리를 들으며 기도하는 평화로운 그림으로 보인다. 그렇지만 이 그림에는 슬픈 이야기가 숨어있다. 농부 부부가 바구니를 밭밑에 놓고 기도하고 있는데 사람들은 그 바구니가 감자씨와 밭일 도구를 담은 바구니로 알고있다. 그런데 사실은 그 바구니에는 씨감자가 들어있던 게 아니라 그들의 사랑하는 아기의 시체가 들어있다. 그 시대 배고픔을 참고 씨감자를 심으며 겨울을 지내면서 봄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의 아기는 배고픔을 참지못해 죽은 것이다. 죽은 아기를 위해 마지막으로 부부가 기도하는 모습을 그린 그림이 '만종'이다. 왜 그림 속의 아기가 사라졌을까? 이 그림을 보게된 밀레의 친구가 큰 충격과 우려를 보이며 아기를 넣지말자고 부탁을 했다. 그래서 밀레는 고심 끝에 아기 대신 감자를 넣어 그려 출품했다. 그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지 않은 채 그저 농촌의 평화로움을 담고있는 그림으로 유명해졌다. 살바도로 달리는 정말 달랐다. 밀레의 <만종>을 보면 누구라도 신성한 노동 후의 고요한 정적과 평화를 느낄 것이다. 그러나 이 그림을 보고 꼬마 달리는 알 수 없는 불안감을 맛보았다. 그 불안감이 얼마나 집요하게 그의 뇌리에 들러붙었는지 달리는 오랫동안 그 까닭을 알아내려 했고, 그에 관한 책을 쓰기까지 했다. 그는 밀레의 <만종>에 그려진 감자자루를 어린아이의 관으로 보고 이루 말할 수 없는 불안을 느꼈던 것이다. 수십 년 후, 이러한 그의 투시력은 환각이 아니라 실제로 정확한 관찰이었음이 밝혀졌다. 루브르 미술관이 자외선 투사작업을 통해 그 감자자루가 초벌그림에서는 실제로 어린아이의 관이었음을 입증한 것이다. 현실 생활에는 서툴렀지만 그럴수록 더욱 더 삶에 대한 투시력을 갖게 되었다는 그의 고백은 참이었던 것이다.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 1904-1989 

어느것도 모방하기를 원치 않는 사람은 어느 것도 창조할 수 없다

스페인의 대표적인 초현실주의 화가! 살바도르 달리는 스페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안타깝게도, 달리의 형은 그가 태어나기 이전에 위장염으로 사망했고, 달리의 부모는 달리가 형의 환생이라고 믿으며 같은 이름을 붙여주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그 이름을 물려받은 달리는 부모가 자신에게서 죽은 형의 모습을 찾으려는 데에 강한 반발 의식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후에 여담이지만 그는 "나는 결코 죽은 형은 아니며, 살아있는 동생이라는 것을 항시 증명하고 싶었다." 라고 했습니다.
이후 달리는 학창시절 마드리드의 대학을 다니며 멋쟁이로 상당히 유명했습니다. 학창시절에 그는 입체파의 영향을 띄었지만 이후에는 다다이즘이 그의 작품에 큰 영향을 끼치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 선생을 비판하고, 학교내에서 선동과 폭동의 주동자로 찍혀 퇴학을 당하며 분리 주의 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감옥에 수감당하기도 했습니다. 1926년 그는 기말고사의 부정행위로 학교에서 퇴학당하게 되었습니다.  퇴학당한 해인 1926년에 달리는 자신이 존경하던 피카소를 파리에서 만나게 되고, 그 영향으로 피카소의 화풍이 달리의 작품에 노골적으로 드러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마 이때부터 초현실적인 그림들이 나타나기 시작한게 아닐까 생각됩니다. 1927년 쯤 그 시기의 달리는 프로이트의 정신 분석학을 탐독하며 그의 열렬한 팬임을 자처했고, 이는 정신의 세계에 대하여 표현하는 중대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때부터 스페인의 화가 디에고 벨라스케스를 모방하며 그의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 하면 여러 초현실적인 작품보다도 그와 열렬히 사랑하던 연인 갈라가 있습니다.  달리의 인생은 그의 뮤즈 갈라를 만나고 나서 달리 인생의 전 과 후가 있을 정도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녀와의 만남은 1929년 카다퀘스의 집에서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당시 프랑스의 시인 폴 엘뤼아르의 부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달리의 열성적인 구애에 흔들려 연정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두 사람은 파리에서 달리의 개인전이 열리던 도중 동반 도주하여 홀연히 잠적했으며, 이후 1934년 1월 30일 달리와 결혼했습니다.   엄청난 명성, 부 그리고 사랑하던 여인까지 얻고 영원할줄 알았던 전성기가 무색할만큼 그의 말년은 비참했습니다. 76세가 되던 1980년 중풍의 영향으로 달리는 붓을 잡기가 힘들 만큼 수전증에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1982년 달리는 국왕으로 부터 기사작위를 받게 되지만 같은 해 6월 10일 갈라가 눈을 감으면서, 달리는 삶에 대한 의지를 잃어 버렸습니다. 1984년 그의 집에서 화재가 발생하여 친구들이 그를 구조하였는데,  이 과정에서 달리는 화상을 입게 되었습니다. 일부 시각에서는 이 화재가 달리의 자살 기도라고 보기도 했습니다. 결국 달리는 1988년 심부전으로 11월 입원하게 되고, 1989년 1월 23일 아침에 그는 84세의 나이에 심장마비로 사망하고 맙니다. 그의 장례는 교회에서 치루어졌으며 카를로스 국왕이 그의 장례식에 참여했습니다.
그는 살아 생전 광기어린 기행으로 유명했는데, 그러한 기행들을 자신의 자서전에 상세히 서술 했습니다. 아래는 그 일부입니다.
-다섯 살때 개미에 뒤덮여 썩어가던 박쥐를 입에 넣었다.  -어렸을때 담비 망토와 금색 왕관을 쓰고 여장을 했다.  -각종 벌레, 쥐가 득실대던 닭장 속에 한나절 칩거했다.  -할머니가 애써 기른 머리카락을 가위로 잘라버렸다.   -열 다섯 살에 파이프를 피우고 넥타이 핀을 꽂고 다니면서 어른 코스프레. -어린 아이를 5미터 높이의 다리 밑으로 떨어뜨려 죽일 뻔 했다. 그는 자신이 어렸을적 약간의 사디즘 성향을 가지고 있었다고 말했다.  -고층 건물에서 자신이 직접 중력을 체험하고자 했다.  -잠깐 네크로필리아에 관심을 가졌다. 다행히도 일시적인 것이었고 그러다가 그만 뒀다고 한다.  -화장실에 갈 땐 언제나 귀나 수염에 재스민 꽃을 꽂았다. 탈취 기능 때문에.  -건강을 위해 담배를 끊고 '수염'을 시작하였다. 담뱃갑에 여분의 수염을 넣고 다니며 사람들에게 "수염 하실래요?"라고 권유한 것. 모 인터뷰에서 그는 자신의 수염을 물엿으로 굳힌다고 밝혔다.

또한 그와 관련된 한가지 일화를 소개하자면, 츄파춥스의 로고는 달리가 직접 디자인했습니다   1969년 달리와 개인적으로 친분이 있던 츄파춥스 사장 베르나트가 함께 커피를 마시던 중에 그에게 츄파춥스디자인에 대한 고민을 털어 놓았고,   달리는 그 자리에서 신문지 위에 빠르게 스케치를 해서 넘겨주었습니다. 간단하게 탄생된 츄파춥스 로고는 이후 1988년까지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살바도르 달리라는 화가는 살아생전 참 독특한 사람이였지만, 다양한 작품들을 통해 지금까지도 유명한 화가로써 우리에게 기억되고있습니다.   초등학생때 어머니와 함께 샤갈,달리 특별전시전을 통해 처음 접하게 되었는데, 어렸던 당시에도 그의 작품들이 머리속에 크게 남았습니다.  지금와서야 달리의 생애를 알고보니 참으로 기이하면서도 말년에는 사랑하는 사람의 죽음으로 삶의 의미를 잃어버렸던 불쌍한 사람이 아닐까 생각됩니다.


(텍스트 자료 출처 : 미술 인명 용어 사전-미술도서편찬연구회/신도출판사)


출처 : 좋은글과 좋은음악이 있는곳
글쓴이 : 銀影(은영)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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